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르후 전투 (문단 편집) === 파병에 소극적인 조선의 광해군 === 명나라는 누르하치 세력을 더 크기 전에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정벌계획을 직접 맡아 요동을 관할하고 있었던 명나라의 요동아문은 북경 조정의 논의와는 별개로 계속 자체 판단하에 파병을 하도록 조선 조정에 압력을 가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일개 지자체가 외국에 계속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것이었지만,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때 이들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 구원병으로 온 명군인 [[조승훈]]과 [[이여송]] 등의 군대는 모두 요동군 소속이었다.] 요동아문의 공문을 무시할 수 없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분조가 되어 직접 전쟁을 지도해보았고, 명군의 실상에도 밝았기 때문에 이 전쟁이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던 듯 하다. 그리하여 명나라의 후금 정벌을 적극적으로 거들어야 한다는 조정의 중론도 계속 무시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광해군의 입장은 >"명나라가 만약에 국력이 충분하다면, 후금 따위는 혼자서도 어렵지 않게 진압할 수 있을테니 우리 도움은 필요 없을 것이다." 였다. 실제로 명나라는 16세기 내내 외란과 내란에 휘말렸지만, 조선에 군사 지원은 요청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선을 위해 임진왜란에 출동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광해군은 만약에 명나라가 조선에 원조를 요청할 정도라면, 명나라가 만주를 지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본 듯 하다. 만일 명나라가 만주를 상실할 경우, 명나라와의 육로는 끊겨버리고 조선은 오로지 후금과 국경을 두고 대치하기 때문에, 군사를 북방으로 보내 소모하기보다는 차라리 압록강 국경 방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본 것이다. 광해군은 이렇게 후금과의 대결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파병에 매우 소극적이었지만 조선 조정의 신료들, 심지어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처형하는데 앞장섰던 [[대북]]의 실권자인 대제학 [[이이첨]] 조차도 이에 호응해 계속 대군을 준비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광해군은 이런 신하들의 주장에 대응하여, 지방기관인 요동아문이 아니라 황제가 있는 북경의 조정에 직접 조선의 사정을 설명하고 황제의 명이 있으면 파병하자는 핑계로 계속 시간을 끌면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신료들은 이런 광해군의 자세에 좀 더 적극성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해군이 이렇게 계속 파병을 미루며 명나라 조정을 떠보고 있을 때,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병왔었던 [[양호(명나라)|양호]]가 여진족 토벌의 대의를 맡은 요동경락에 임명되면서 조선 조정에 보내오는 압력이 더욱 커졌다. 양호는 아예 조선 사신이 명나라 조정에 보내는 글을 중간에 가로채 읽고, 조선 조정이 파병을 미루는 여러 핑계를 반박하는 항의성 공문을 보내오기도 했다.(《광해군일기》 10년 7월 23일) 이렇게 요동아문의 독촉은 한 귀로 흘리던 광해군은 베이징에서 신종 [[만력제]] 명의의 조서가 내려오자 결국 마지못해 파병을 결정했다.(《광해군일기》 11년 2월 13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